역사10 최악의 '합법적 약탈자' 왕민정과 호양보 [병자호란 2편] 임금이 되고자 수 많은 피가 흘렀으나, 이제는 뼈까지 내놓는 상황이 되었다. 1623년 3월 13일에 즉위한 인조는 1624년 이괄의 난때문에 제대로 된 정식 파티 한 번 하지 못하고 죽음의 위협에 두려워했다. 이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정식 파티를 꼭 해보고 싶었는지 인조는 1625년 4월 18일 경덕궁에서 공신들을 불러 회맹연을 연다. 회맹연이란, 권력을 영원토록 향유하길 축원한 뒤, 임금에게 충성을 공신들에겐 보호를 맹세하는 자리를 말한다. 4일 뒤 22일 이번에는 반정공신들과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신들을 다같이 모아 분축연을 연다. 분축연이란 비단 위에 쓴 공신교서를 주는 의식을 거행한 뒤 베푸는 잔치를 말한다. 사실 인조가 연달아 잔치를 연 것은 "명나라에서 인조를 책봉하.. 2021. 7. 10. 인조 반정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 1편] 1623년 "폐모살제와 배명의 패륜 그리고 과도한 궁궐 건설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광해를 몰아낸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능양군과 이귀, 김류 등의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즉위 직후 인조는 공신록을 작성해 '계해정사공신'을 설정한다. 공신록에 따르면 이귀, 김류, 김자점 등 10명의 1등공신, 이괄 등 15명의 2등공신 나머지 28명의 3등공신 총 53명의 공신이 정해지는데 이괄은 여기에 큰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괄이 부원수로 평안도로 떠난 3개월 뒤인 10월 중순에 공신록이 발표되고 1월에 이괄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 것을 보면 공신록이 이괄의 난의 원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반정 당시 대장이었던 김류는 거사성공 여부에 대한 고민으로 밍기적 거려 .. 2021. 6. 26. 간신인가 풍운아인가 - 조선 유자광 2편 *지난 1편 수정 사항이 있어 사과와 함께 말씀드립니다. 유자광이 서자라고 작성된 부분이 있으나, 유자광은 서자가 아닌 얼자 출신인 점 말씀드립니다. (얼자는 어머니가 노비인 자식으로, 노비종모법에 따라 실제 신분은 노비로 서자보다 더 몹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조의 비호 속 성장한 유자광. 그런 세조가 죽은 후 그의 인생에 파도가 치기 시작합니다. 이시애의 난 이후 성장한 신훈(신 공신 세력)과 원훈(세조 때 기존 공신) 세력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것이죠. 유자광과 함께 신훈의 대표주자였던 남이는 원훈과의 권력 싸움을 위해 유자광을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남이는 유자광이 신훈 세력이었기에 그와 함께 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죠. 그러나, 유자광은 남이의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 세력으로 넘어.. 2021. 5. 31. 간신인가 풍운아인가 - 조선 유자광 1편 오늘은 세조~중종 초기의 관료로 역사 상 간신 중 간신으로 취급받는 유자광 편입니다. 유자광은 조선 초기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관여한 인물이자, 조선 최초로 서자가 육조낭관에 오르는 기록을 세운 풍운아이기도 합니다. 유자광은 중추부지사 유규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유규가 백호 꿈을 꾸고 나서 부인에게 아이를 낳자고 달려들었다가 대차게 까이고 다른 사람에게서 낳은 서자입니다.(혹자는 부인의 몸종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얼자... 서자는 양인 첩, 얼자는 천민 첩) 바로 이 '서자'라는 타이틀이 유자광의 인생을 결정짓게 됩니다. 서자로 태어난 이상 Only 무과시험,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소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됩니다. 유자광은 생애 내내 서자라는 이유로 온갖 괴롭힘을 당합니다. 유자광은 자.. 2016. 4. 21.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