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폐모살제와 배명의 패륜 그리고 과도한 궁궐 건설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광해를 몰아낸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능양군과 이귀, 김류 등의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즉위 직후 인조는 공신록을 작성해 '계해정사공신'을 설정한다. 공신록에 따르면 이귀, 김류, 김자점 등 10명의 1등공신, 이괄 등 15명의 2등공신 나머지 28명의 3등공신 총 53명의 공신이 정해지는데 이괄은 여기에 큰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괄이 부원수로 평안도로 떠난 3개월 뒤인 10월 중순에 공신록이 발표되고 1월에 이괄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 것을 보면 공신록이 이괄의 난의 원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반정 당시 대장이었던 김류는 거사성공 여부에 대한 고민으로 밍기적 거려 군사들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를 진정시켜 군사들을 이끈 것이 이괄이었다. 반정 성공 후 "이괄이야 말로 병조판서 감"이란 말도 돌았으나, 김류는 1등공신이 되었다. 오히려 자신은 병조판서는 커녕 도성 밖으로 쫓겨나고, "이괄의 아들이 반역을 꾀한다"라는 소문까지 퍼져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괄이 난을 일으킨 것은 당연하지 않나 싶다. 웃긴건 먼저 선빵을 치는 것은 이괄이 아니라 인조라는 점이다. 인조가 먼저 금부도사들을 파견해 이괄을 잡아들이려 했다. 이괄은 이를 듣고 군사를 남하한 것이다.
이괄의 난은 조선 시대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두번째 사례로 꼽힌다. 2월 8일에 이괄군이 임진강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바로 공주로 도망간다. 명분은 "국가 위기인 만큼 선조임금과 같이 분조를 실시한다."라는 거였지만 말 그대로 도망이었다. 숭례문 문이 잠겨있자 신료의 하인이 자물쇠를 부셨고, 한강변에 배가 없어서 건너편까지 무사 우상중이란 자가 헤엄쳐서 배를 구해왔고 배를 구한 뒤에도 경호군이 건너지 못해 그 자리에 한참 떠있었다. 양재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 유생 김이라는 자가 콩죽을 쑤어 인조를 맞이했는데, 이 콩죽 한 그릇때문에 김이는 의금부 도사로 임명된다. 이는 인조가 그 당시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괄군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해 수원에서는 이정구, 오윤겸 등이 "동래 왜관에서 왜인 1천명을 빌려다가 반란군을 쳐야한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눈앞에 위기가 닥치자 임진년의 원한이고 뭐고 따질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2월 10일 이괄이 한양에 입성했다.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한 것은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심지어 경기 지방에선 인조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고, 한양에선 새로운 임금이 추대되었다. 인조 체제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민심도 인조를 저버렸다. 도성 백성들은 이괄군을 맞이했고, 창경궁을 습격해 불태웠다.
그리고 반정공신들의 저택을 점령했다. 인조가 파천한 공주의 충청도 민심도 마찬가지였다. 의병 모집에 호응한건 사족들 뿐 백성들은 이를 무시했으며 경상도에서는 의병모집이 차단당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이괄의 전성기는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괄보다 서북쪽 위에 있던 도원수 장만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 것이다. 당시 장만은 지구전을 계획했으나, 뭘 좀 아는 부하 정충신은 도성보다 높은 고지인 안현을 장악하자 주장했고, 장만은 이를 따랐다. 이괄에게 불행했던 점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가 불을 피우기도 전에 생포되었다는 점이다. 이괄은 그 다음날 안현이 점령당했음을 알았다.
기세에 취한 이괄은 관군을 무시하며, 안현으로 돌격을 지시한다. 1624년 2월 11일 기록에 따르면 아침 6시 즈음에 반란군과 관군이 부딪힌다. 도성의 백성들은 전투가 없는 다른 고지에서 이를 구경했다. 그런데 애초에 관군이 있는 안현은 고지에 위치해 있어 반란군이 공격하는 입장에서 매우 불리했다. 화살과 총알이 제대로 가지 못했기 때문인다. 게다가 싸움이 중반으로 치닫을 쯤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어 승기가 관군쪽으로 간 것이다. 이를 구경하던 백성들은 재빨리 돈의문과 서소문을 닫아버린다.
이괄군을 환영한지 2일도 안되 민심은 이괄을 버린 것이다. 11일 밤에 이괄은 도성을 탈출했고 이괄은 부하 기익헌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괄에 의해 추대된 흥안군마저 살해되어 이괄정권은 4일만에 끝난 것이다. 관군 승리의 1등공신인 정충신은 노비에서 최고 지휘의 무신까지 경험하는 신분상승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인조는 13일에 승전보를 들었으나 겁을 너무 먹어서 그런지 그대로 공주로 들어갔다. 15일에 이괄의 수급을 받은 인조는 22일에 다시 도성으로 귀환한다. 어이없는 건 인조가 들어간 궁이 경덕궁인데, 경덕궁은 인조가 광해군을 디스할 때, 언급했던 광해군이 신축한 궁궐 중 하나였다.
문제는 도성의 상태였다. 민심은 개판이었으며,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란 보고가 올라왔다. 궁궐엔 피바람까지 불었다. 인조가 도망가기 직전 모든 정치범을 즉결처분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 이괄군이 도성을 버릴 때, 80명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인조가 돌아온 후 좌의정 윤방은 "2백명의 백성들이 이괄군에 붙었기 때문에 그들을 베었다."라고 보고했다. 게다가 빈집털이 당한 공신들은 지나가는 백성들에게 화풀이를 해 포도청에 신고를 했다. 당시 포도청 감옥이 가득 차서 포도청이 손을 놓자 공신들이 직접 백성들의 집에 쳐들어갔다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인조는 이후 호위부를 만들고, 공신들에게 특별히 군관들을 모집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도성엔 백성보다 군관들이 많다."라는 소문까지 들릴 정도로 인조와 공신들의 불안감은 엄청났다. 호위부를 만든 인조는 바로 "인조를 지킨다"라는 명목으로 어영군과 총융군을 만들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정비한다. 얼핏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이나, 이를 위해 평안도를 포함한 서북방의 방위를 거의 포기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덧붙여, 일본에 대한 해안 방위마저 재정 문제를 빌어 포기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 외 모든 것을 포기한 셈이었고, 이는 삼전도로 이어지는 비극의 요인이 된다.
출처: 한명기 교수님의 '역사 평설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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