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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철의 역사스페셜

헬조선? 진짜 헬이었던 조선. 역사스페셜 '경신대기근' 3편

by Dreamer's advisor 2016. 3. 29.

헬조선 경신대기근. 오늘은 마지막 3편으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림은 EBS 채널 e에서 다룬 경신대기근 편 스크린 샷.


막장의 1670년이 지나갔지만.. 1671년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사자는 계속 늘어나 수천명 단위로 보고되었고 눈만 뜨면 시체가 보이는 그야말로 지옥이 펼쳐졌습니다. 이 수천명 단위의 아사자도 구휼소에서 죽은 사람들만! 집계한 것이니 상황은 완전....

1671년 봄 보리 수확을 기다렸지만 당연히 보리는 없었고.. 1671년 봄을 기점으로 만명의 아사자가 보고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우역, 인역 할것없이 역병은 계속 퍼져만 나갔습니다. 대기근에 따라 발생한 수많은 유민들은 면역력이 매우 약한 수준이었는데, 이들이 역병의 매개체가 된 것입니다. 

1671년 서울 시내로 역병이 퍼지게 됩니다. 서울에 연 진휼소에 전국의 유민드이 몰렸기 때문이죠.. 이로인해 궁궐을 지키는 군인까지 역병에 걸려 궁궐 수비, 왕에 대한 경호 모든 것이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궁녀들은 추방되었고, 개중에는 병에 걸려 사망한 사람들이 섞여있었습니다.

전 편에서 가는데 지위고하따위 없다. 가는데 순서없다. 라고 썼었는데, 진짜로 그 말이 본격적으로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임금의 다섯째 누이인 숙경공주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해 2월 2일 왕족들은 경덕궁으로 거쳐를 옮기게 됩니다.

궁궐이 이모양이니 서울 진휼소를 중심으로 그냥 다 죽어갔습니다. 사대부, 천민, 평민, 왕실 종친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니 지방 수령들은 도망가고, 파발을 담당한 사람들은 역참의 마비에 오다가 역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난리가 나서 행정은 마비 상태. 심지어 관리들은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영의정 허적은 14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다만 현종은 "다른 사람 다 나가도 너는 안된다."라며 허적을 잡아두었죠.

이젠 서울마저 시체로 가득찬 거리가 되었습니다. 시체를 치울 가족들도 기근으로 죽거나 떠나서 시체를 치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서울시 공무원인 한성부 관원들은 숫자가 적고 이들마저 기근과 역병으로 사람이 없어서 시체를 치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시체치우는 일에 승려들까지 동원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수천 구의 시신을 합동 매장한 일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경신년동안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5만 2천 여명이 보고되었고, 이중 절반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이습니다. 전라도는 사망자 비율이 무려 54%였다고 하네요(당시 농업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다 보니 인구가 많아서..)

이정도 상황까지 오면(솔직히 이게 지옥이 아니면 뭐가 지옥일지..) 사람도 동물이 되어버리는데 조선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 유교국가에서 천륜도 인륜도 다 저버리는 상황까지 와버립니다. 부모들이 아이를 강에 버리고 가는 상황이 일어난거죠. 배식 대기 중인 부부 중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는 신경도 안쓰고 남은 죽까지 다 먹은 후에 슬퍼했다고.. 아들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고.. (솔직히 이거에 대해서 뭐라 할 수 없는게 당시 상황을 겪지 않은 우리는 그 상황을 모르니까요..)

지옥의 하이라이트. 카니발리즘까지 일어납니다. 인육, 식인이 보고되었습니다(아....ㅠㅠ) 평소였으면 나라가 왈칵 뒤집어졌어야 정상이지만 이 당시에는 워낙 흔한 일이라...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라고 담담하게 기록할 정도..

이쯤되니 정부는 뭐하냐, 조선정부 개쓰레기.. 란 의견이 나올만도 한데, 조선 정부는 솔직히 잘 대처한 편입니다. 이는 다음 편이자 마지막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조선 정부의 대처 그리고 조선 정부에 대한 변, 그리고 후일담은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실패하는 양 조절..제가 바로 죽일놈입쇼..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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