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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철의 역사스페셜

최악의 '합법적 약탈자' 왕민정과 호양보 [병자호란 2편]

by Dreamer's advisor 2021. 7. 10.

임금이 되고자 수 많은 피가 흘렀으나, 이제는 뼈까지 내놓는 상황이 되었다.


1623년 3월 13일에 즉위한 인조는 1624년 이괄의 난때문에 제대로 된 정식 파티 한 번 하지 못하고 죽음의 위협에 두려워했다.

 

 이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정식 파티를 꼭 해보고 싶었는지 인조는 1625년 4월 18일 경덕궁에서 공신들을 불러 회맹연을 연다. 회맹연이란, 권력을 영원토록 향유하길 축원한 뒤, 임금에게 충성을 공신들에겐 보호를 맹세하는 자리를 말한다.

 4일 뒤 22일 이번에는 반정공신들과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신들을 다같이 모아 분축연을 연다. 분축연이란 비단 위에 쓴 공신교서를 주는 의식을 거행한 뒤 베푸는 잔치를 말한다.

 

 사실 인조가 연달아 잔치를 연 것은 "명나라에서 인조를 책봉하기 위한 사신이 온 다"는 사실때문이었다. 1623년 즉위한 이후 명나라에선 인조를 '서조선국사'라며 단지 조선의 경비원 급으로 취급했던 명나라가 드디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한다니 인조입장에선 콩댄스를 춰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알지 못했다. 자신을 임금으로 완성시킬 이들이 어떤 짓을 할지.. 이들이 불러올 공포를 알지 못했다.

 

 명나라에서 오는 책봉사는 환관 왕민정과 호양보. 이들은 말그대로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명 조정의 실질적 지배자인 위충현에게 뇌물을 바치고 조선행을 자원했다. 왜 그들은 비행기도 없는, 게다가 육로도 차단된 시기에 머나먼 조선행을 자원했을까? 바로 자신들의 주머니속에 들어갈 은과 인삼때문이었다.

 

 임난 이후로 명 사신들은 수만 냥의 은화를 쳐먹고 갔다. 심지어 1622년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러 온 사신들마저 뇌물을 쳐드시고 가셨으니 이 위대한 선배들의 얘기를 듣고 자라온 이들이 자원한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심지어 왕민정은 부모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조선행을 자원했다.

 

 1625년 2월 호조의 보고서에 따르면 은 10만냥과 인삼 수천 근으로 예산을 책정했다. 이를 위해 토지 매 4결마다 베 1필을 특별세로 거둬갔다. 문제는 이 백성들에게 핵폭탄같은 '특별세'도 예산을 충당할 수 없었다. 이괄의 난 이후에 도성에 임금먹일 쌀도 없다고 했는데 뭐 돈이 있는게 신기할 정도. 돈 문제로 머리가 아플 때, 누군가 아주 대단한! 제안을 한다.

 

 "가도(지명)에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은 3~4만냥을 빌리자!라는 제안"이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명나라 장수에게 돈을 빌린다라.... 이괄의 난 당시" 이괄군 선봉인 항왜(일본에 대항한 일본인)들을 막기 위해 일본에게 군사를 빌리자"란 제안 이후 등장한 이 대단한 아이디어는 전과 달리 실현된다.

 


지금 여기서 언급된 '모문룡'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가는 핵심 인물로 한반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돈까지 빌려 예산을 준비했으나, 왕민정과 호양보는 그야말로 재앙이였다. 이들은 개경에서 1만 2천냥의 은을 뜯었다. 그리고 1625년 6월 3일 드디어 한양에 도착한 이들은 인조가 손바닥 닳도록 아부를 했음에도 예단이 부족하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조는 이를 만류하며 매달렸다. 6월 4일부터 7일까지 이들은 매일! 은 1만냥과 인삼 20근씩 챙겼으며 6월 12일에는 인조를 직접 찾아가서 그 자리에 있는 보검을 달라고 요구했다.

 

 일제시대 이전 이같은 약탈자들은 없었다. 이들은 조선에서 뜯은 은 중 5천냥을 되돌려주며 인삼 500근을 달라고 요구했다. 모든 고통은 인조가 아니라 개경 백성들의 몫이었다. 당시 개경감옥엔 인삼 징수에 반대한 이들이 가득 찼으며 스스로 자살하는 주민들마저 등장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물을 건널 때 다리가 없으면 '무교가'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고 이를 거부하면 직접 수행원들을 이끌고 고을 수령까지 줘팼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엔 인간빼고 남는 것이 없었다. 이쯤되면 왜 이들이 태풍이며 재앙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들은 조선에서 "은 16만냥과 인삼 수 천근"을 챙겼다. 서울에서만 10만 7천냥의 은, 2천 1백 근의 인삼을 뜯어갔다. 그리고 황해도에서 2만냥 평안도에서 약 3만냥 정도를 수탈했다.

 전 편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방(海防)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있었다. 진짜로 돈이 없었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 왕민정과 호양보, 이들은 합법적으로 조선을 털어간 최초이자 최악의 약탈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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